제목의 ‘모리타니안’은 ‘모리타니 공화국 사람’이라는 뜻이다. 제목만 놓고 보면 어떤 판단도 개입하지 않는 듯 가치 중립적이다. 이 영화를 만든 감독은 캐빈 맥도널드다. 팝스타 휘트니 휴스턴, 레게의 전설 밥 말리에 관한 다큐멘터리 <휘트니>(2018)와 <말리>(2012), 검은 히틀러로 불리는 우간다의 독재자 이디 아민을 주인공으로 한 극영화 <라스트 킹>(2006)을 연출하는 등 실화에 관심을 두고 이를 사실적으로 옮기는 데 장기를 보이는 연출자다.
캐빈 맥도널드가 이번에 주목한 인물은 ‘모하메두 울드 슬라히’다. 『관타나모 다이어리』를 출간한 작가다. 슬라히(타라 라힘)는 책을 쓰기 이전 9.11 테러의 주동자로 몰려 관타나모 수용소에서 2002년부터 2016년까지 무려 14년 동안 수감된 전력이 있다. 슬라히의 사촌이 빈 라덴의 휴대폰으로 슬라히에게 연락을 했다는 이유에서였다. 기소도, 재판도 없이 관타나모에 끌려간 슬라히는 혐의를 인정하라는 미국 측에 맞서다 고문과 협박으로 제정신이 아닌 상황에서 자백할 수밖에 없었다. 그 실체가 이 책에서 폭로되고 있다.
이 책은 서신의 형태를 띠고 있다. 슬라히가 변호를 맡은 낸시 홀랜더(조디 포스터)에게 관타나모에서 겪은 일을 편지로 설명했던 까닭이다. 미국 정부는 일이 시끄럽게 되기 전에 슬라히에게 사형을 구형하려고 군검찰관 스튜어트 카우치(베네딕트 컴버배치)를 주목한다. 카우치는 9.11 당시 친구를 잃은 아픈 기억이 있다. 테러리스트의 협박에 비행기를 몰고 월드 트레이드 센터를 향했던 기장이 바로 그의 친구였다. 반드시 대가를 치르게 하겠다고 관련 보고서를 열람하던 중 카우치는 슬라이에게 행한 미국 정부의 부정을 확인하고 경악한다.
글 서두에 이 영화의 제목에 대해 어느 쪽으로 치우쳐 보이지 않는다고 언급했지만, 실은 이 작품의 선택 자체가 감독의 의중을 반영하고 있다. 캐빈 맥도널드는 이렇게 연출의 변을 밝혔다. “고통 속에서도 온기와 인류애를 품고 있는 작품을 만들고자 했다.” 그처럼 <모리타니안>은 슬라히가 인간 가치를 회복해 가는 과정에서 미국 정부의 불법적인 행위를 알리고자 했던 낸시와 국가의 이익을 위해 힘없는 개인을 희생할 수 없다는 소신을 밝힌 카우치의 바람처럼 과연 진실은 무엇인가를 묻는다.
영화는 슬라히의 유무죄 여부를 두고 진실을 은폐하는 미국 정부와 줄다리기 하는 낸시, 카우치의 고군분투를 다룬 현재 시점을 2.35:1의 화면비로, 슬라히가 관타나모에서 겪은 과거 시점의 실상은 1.33:1의 화면비로 각각 달리하여 보여준다. 낸시를 만나면서 사회와 소통할 수 있게 된 슬라히에게 현재 시점이 2.35:1의 좀 더 넓은 세계라면 사방이 철창으로 담을 둘러 억울함을 호소할 길 없는 과거 시점은 독방에 갇힌 듯 답답한 1.33:1의 상자와 같다.
상자의 형태에 주목하여 좀 더 해석하자면, 관타나모에서 슬라히가 겪은 실상은 미국 정부가 세상에 밝히기를 꺼려 어떻게든 감추고자 했던 일종의 ‘판도라의 상자’다. 실제로 슬라히가 쓴 『관타나모 다이어리』 는 관타나모 수용소의 실태를 고발한 최초의 수용자 증언록이다. 이 책의 출간으로 전 세계의 인권 단체들은 슬라히의 석방을 주장하는 것은 물론, 관타나모 수용소에서 일어난 불법적인 행위들에 대해 미국 정부가 공식적으로 인정하고 사과하기를 촉구했다.
그리스 신화 속 판도라의 상자에는 세상을 혼란하게 할 온갖 재앙과 악행이 담겨 있다. <모리타니안>의 관타나모 실상은 영화 <관타나모로 가는 길>(2006)을 비롯하여 다양한 매체로 알려진 바 있다. <모리타니안>이 9.11 테러에 후속 조치하는 미국과 관련하여 뚜껑을 연 판도라의 상자에는 고문과 협박의 내용만 담겨 있지 않다. 낸시는 미국이 9.11 테러범이라며 관타나모에서 행한 인권 말살의 현장을 허가하고 묵인하고 방조한 조지 W. 부시 대통령과 도널드 럼즈펠드 국방부 장관을 향해 분노를 감추지 못한다.
슬라히는 2010년 그의 자백이 정상적인 상황에서 이뤄진 것이 아니라는 것이 증명되어 수감 생활을 끝내도 된다는 판결을 받는다. 하지만 그는 6년을 더 관타나모에 수감되어 2016년이 되어서야 석방될 수 있었다. 미국 정부가 판결에 불복하여 항소했기 때문이다. 당시 미국 정부의 대통령은 버락 오바마이었다. 오바마의 당선과 함께 미국은 새로운 역사의 길로 들어섰지만, 자국의 이익과 반대쪽에 있다고 선을 그은 세력과 개인에게 취하는 폭력의 행위는 정권의 성격과 상관없이 일관된 노선을 견지했고 지금도 그렇다.
캐빈 맥도날드가 <모리타니안>으로 판도라의 상자를 개봉하여 꺼내 보이고 싶었던 건 미국의 실체다. 그들에게 있어 가치 판단의 기준은 자국의 이익에 도움이 되는 아군과 해가 되는 적군으로 나누는 이분법에 있다. ‘모리타리안’과 같은 가치 중립의 단어에서도 미국 정권은 이익과 손해를 구별하여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를 계산한다. <모리타리안>은 석방 후 고향 모리타니 공화국에서 해 맑은 웃음으로 현재를 충실히 사는 슬라히의 실제 모습을 에필로그로 덧붙인다. 그 영상 속 슬라히는 너무 평온하여 관객 입장에서는 방해받지 않았으면 하는 생각이 간절하다. 평화를 해치는 건 과연 누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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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남웅(영화평론가)
영화에 대해 글을 쓰고 말을 한다. 요즘에는 동생 허남준이 거기에 대해 그림도 그려준다. 영화를 영화에만 머물게 하지 않으려고 다양한 시선으로 접근하기 위해 노력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