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듦을 읽다
[나이듦을 읽다] ‘죽어감(dying)’에 대한 정밀한 지도가 필요하다
나이든 삶의 모습을 책을 경유해 다양한 측면으로 상상해 보는 리뷰 시리즈 ‘나이듦을 읽다’. 더 나은 생의 끝자락을 모색하려 시도하는, 허대석의 『우리의 죽음이 삶이 되려면』.
글: 송병기
2025.1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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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가 오랫동안 치매를 앓다가 코로나 때 돌아가셨어. 맏며느리인 어머니가 그 곁을 지키느라 고생이 많으셨거든. 그래선지 당신은 나중에 스위스로 가고 싶다고 하더라. 늙고 아프면 본인뿐 아니라 주변까지 너무 고통스럽게 한다고. 어머니를 거길 모시고 가야 할까? 고민스러워.” 한 친구 녀석이 저녁 식사 자리에서 말했다. 최근에 결혼한 그의 근황을 물었을 뿐인데 전혀 생각지 못한 이야기가 흘러나왔다. 그가 뱉은 스위스라는 단어가 마음에 걸렸다. 그곳이 이른바 ‘안락사하러 가는 곳’을 의미했기 때문이다.

 

친구가 밝힌 자초지종은 이러했다. 6년 전, 치매 진단을 받은 할머니는 무엇보다 가족에게 폐를 끼칠 것을 염려했다. 평소에도 건강 관리에 신경을 썼지만 진단 이후에는 더 열심히 운동을 하고 병원을 다녔다. 또 의식적으로 모든 일을 스스로 해결하려 했다. 베란다에 있는 무거운 화분도 혼자 옮기고, 며느리들이 만들어 오던 밑반찬도 굳이 사양했다. 그러나 갖은 노력에도 불구하고 노인의 인지기능장애는 심해졌다. 방문요양보호사와 간병인이 필요한 정도에 이르렀지만, 할머니는 낯선 사람들이 자신의 공간을 드나드는 것을 불쾌해했다. 그렇다고 회사 일로 바쁜 자식들이 상시 그의 곁을 지키는 것도 쉽지 않았다. 결국 할머니는 죽기보다 싫다던 요양원에 입소하게 되었다.

 

친구 어머니는 할머니의 죽음에 상심이 컸다. 어쩌면 그는 시어머니의 말년을 보며 몇 년 전 암으로 돌아가신 친정어머니를 떠올렸는지도 모른다. 온갖 공격적인 치료를 받다가 중환자실 기계에 둘러싸여 외롭게 임종한 사람. 무엇이 필요한 치료이고 무엇이 불필요한 치료인지 무 자르듯 나누기 어려운 현실 속에서 환자와 가족, 의료진은 갈팡질팡했을 뿐이다. 다시 말해, 어머니는 가까운 이들의 마지막이 결코 평온하지 못했다는 생각 때문에 힘들어했다. 이런 죽음의 경험을 본인은 물론이거니와 자식 또한 하지 않기를 바란다. 친구 어머니에게 죽음은 미안함을 낳는 일이자 경황없는 작별이다. 친구 어머니가 밝힌 죽음에 대한 생각은 가까운 사람이 나이 들어 아프고 죽어가는 모습을 지켜보며 얻은 감각에서 비롯되었다. 스위스행도, 바로 그 경험이 만들어낸 ‘더 나은 생의 끝자락’에 대한 갈망에서 나온 판단이 아닐까.

 

오늘날 ‘죽어감(dying)’이란 시간, 즉 죽음에 이르는 과정을 어떻게 바라봐야 할까. 왜 우리네 생애 말기는 이토록 궁색하고 공포스러운 경험으로 다가오는가. 굉장히 큰 질문이고 단박에 답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니다. 그럼에도 고무적인 것은 점점 더 많은 사람이 이 문제에 관심을 갖고 자신이 겪은 이야기를 공유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렇게 사람들은 새로운 길을 모색하고 있다. 그 흐름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책 한 권을 소개하고자 한다. 혈액종양내과 전문의 허대석의 『우리의 죽음이 삶이 되려면』이다. 



허대석의 책은 생애 말기 누구나 마주하게 될 연명의료에 대한 이해를 돕는다. 일상에서 연명의료는 대개 ‘가족을 괴롭히는 짓’, ‘살지도 못할 사람을 억지로 병원에 붙잡아 두는 것’, ‘쓸데없는 돈을 쓰게 하는 일’ 등으로 인식된다. 하지만 정작 연명의료가 왜 생애 말기 논쟁의 중심이 되었는지,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는지, 법과 제도는 어떤 역할을 하는지에 대해서는 사람들의 관심이 크게 닿아 있지 않는 것 같다. 따라서 연명의료를 의료 전문가들의 영역으로 치부할 것이 아니라, 일종의 ‘시민 교양의 언어’로 이해할 필요가 있다. 이는 곧 오늘날 ‘죽어감(dying)의 지형도’를 파악하는 일이다. 내(우리)가 어디에 서 있는지를 알아야, 앞으로 어디를 어떻게 걸어갈지 방향을 정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의료기술의 발전은 인류 번영에 기여했지만 동시에 삶과 죽음, 그 어느 것도 아닌 ‘회색지대’를 만들었다. 때가 되면 죽는 시대는 저문 지 오래다. 이제는 죽음의 시기를 예측하고 준비하며 결정해야 하는 시대에 들어섰다. 인위적으로 인체 기능을 조절할 수 있는 연명 도구가 급속히 발달하면서, 회생 가능성 예측이 굉장히 어려워졌다. 진료 현장에서는 회생 가능성의 판단이 100퍼센트와 0퍼센트로 명확히 구분되는 경우는 거의 없고 다만 확률을 예측해볼 수 있을 따름이다.”(40쪽)

 

연명의료는 어느 날 갑자기 하늘에서 떨어진 것이 아니다. 분명한 역사적 맥락이 존재한다. 허대석의 책을 통해 연명의료가 어떠한 경로를 거쳐 오늘에 이르렀는지를 살펴보며, 우리가 마주한 죽어감의 현실을 다시 생각해 보자. 저자는 30여 년간 암 환자를 진료한 임상의이자 연명의료결정법(정식 명칭은 ‘호스피스ㆍ완화의료 및 임종과정에 있는 환자의 연명의료결정에 관한 법률’이다)을 만드는 데 기여한 행정가이다. 그는 풍부한 임상 경험과 사례, 쟁점을 바탕으로 환자, 가족, 의료진이 겪는 어려움을 다각적으로 설명한다. 이러한 서술을 통해 한국 사회의 연명 의료가 지닌 현실을 더 깊이 들여다볼 수 있다. 연명의료라는 렌즈를 통해 우리가 살고 있는 삶의 터전을 곰곰이 되짚어 보게 된다.

 

허대석의 책을 계기로, 생의 끝자락에 대한 상상력을 더 키워보면 좋겠다. 연명의료의 찬반 구도를 넘어, ‘죽어감’이란 시간을 어떻게 더 두텁게 만들 것인지 고민해야 한다. 그 시간을 보내는 사람의 목소리와 그 삶의 역사를 존중할 수 있는 방법을 다각적으로 모색해 보자. 지금의 죽어감은 특정한 기술과 역사, 제도, 법, 지식, 사물들이 얽혀 ‘구성된’ 현실이다. 뒤집어 말해, 이제는 우리의 바람과 필요에 따라 또다른 죽어감을 ‘만들어갈’ 수도 있다. 그 새로운 죽어감에 대한 이야기를 본격적으로 시작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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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병기

의료인류학자. 우리의 일상과 공동체를 ‘죽음’이라는 렌즈로 들여다본 『각자도사 사회』를 썼으며, 동료들과 함께 『나는 평온하게 죽고 싶습니다』와 『죽는 게 참 어렵습니다』를 저술했다. 현재는 ‘안락사’에 관한 책을 집필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