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현우의 파세자타
[최현우 칼럼] 소년이여, 신화가 되었는가
일본 서브컬쳐의 역작, 애니메이션 <에반게리온>을 통해 '인간'이라는 질문에 대해 생각해 봅니다.
글: 최현우
2025.1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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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전히 기억하는 2002년 한국의 여름은 어떤 강렬한 상징처럼 내게 남아있다. 당시 나는 중학생이었다. 한일 월드컵이 열렸고 한국은 가히 집단적 광기 상태라고 일컬어도 무리가 아니었다. 모두가 붉은 티셔츠를 입고, 사람이 모일 수 있는 공간마다 대형 텔레비전이나 스크린을 설치하고는 함께 모여 축구 경기를 지켜봤다. 심지어 엄숙하고 비통한 장례식장에서도 월드컵 본선이 진행되는 동안에는 기쁨의 환호성이 쏟아졌다. 모든 사람과 매체가 연일 축구 최약체 한국이 이루어내는 스포츠 드라마 이야기뿐이었고, 모두는 스스럼없이 열광했다. 누군가는 이것이 빠르게 발전한 한국 사회의 힘을 상징하는 광경이라 말했고, 단일 민족으로 이루어진 동방의 작은 국가가 보이는 단합력을 높이 사며 분석했다. 그때의 우리는 이견 없이 동의했다. 토너먼트를 이겨나갈 때마다 사람들은 거리로 우르르 쏟아져 나왔다. 무수한 적혈구 같았다. 우리의 국가가 마치 세계의 중심이 된 것 같은 환상은 모두에게 달콤했다. 히딩크 감독이 이끄는 축구 국가대표팀은 국가적 영웅이었고, 축구라는 스포츠는 스포츠가 가지는 근원적 기능에 충실하여 가상의 국력이 충돌하는 모의 전쟁의 역할을 강력하게 수행했다. 한국은 월드컵 본선 4강에 진출했다. 여전히 그 기록을 신화라고 부른다. 그리고 한국은 이후로 그 승리에 다시 도달하지 못했다. 

 

미리 밝혀두지만, 나는 스포츠에 문외한이다. 승패를 가르는 승부의 세계를 즐기는 성격이 못될뿐더러, 안타깝게도 어떤 스포츠도 매료되어 기술이나 취미의 영역으로 두지 못했다. 늘 그늘에 앉아 육체의 일보다는 정신의 일에만 관심이 갔던 탓이다. 그럼에도 2002년의 기억이 내게 남긴 건 특정 단체나 지역을 넘어 국가의 전반적 모두가 하나가 되는 광범위한 ‘집단’으로의 경험이었다. 특히 2002년이라는 시기는 세기의 머리 숫자가 바뀌는 세기말을 통과한 직후라는 점에서 의미가 깊었다. 2000년대가 되면 세상이 크게 바뀌어버릴 것만 같았다. 유년을 통과하며 섭취한 모든 공상의 산물들은 말도 안 되는 설정과 상상일수록 2000년대 이후에는 능히 가능할 것처럼 눙치며 모든 개연성을 미래에 떠밀었다. 더불어 그 시절의 인류는 반성문을 쓰듯 지난 천년을 회고하거나 정리하는 듯이 굴었다. 반성하고 예측하고 불안해하거나 조심스럽게 낙관했다. ‘지구촌’이라는 말이 유행했다. 인종을 넘어 인류는 하나라는 관념. 국가는 장벽을 허물고 교류하며 모든 인간은 제한 없이 지구의 모든 곳을 함께 누려야 한다는 분위기. 우리는 하나의 종족이니까. 그것이 선이었고, 새로운 천년을 맞아 이룩해야 할 인류의 과업이었다. 멸종하지 않고 생존한 인류를 우리 스스로 대견하게 여기고 위로하고 싶은 마음이었을까. 유토피아는 소수의 옥좌로 이루어진 곳이 아닌 다수의 나무 벤치로 만들어지는 것이라고 당연하게 생각했다. 그것이 문명의 전망이었다. 이 글을 적는 2025년 늦가을의 입장에서, 그 시절은 왠지 멀게만 느껴진다. 전쟁도 차별도 가난도 여전히 사라지지 않았다고 먼 미래를 향해 기록해 둔다. 오히려 우리는 이전보다 더 무수히 싸우고 치밀하고 치졸하게 다투고 있다고, 덧붙이면서.

 

 

이 대목에서 일본의 애니메이션 감독, 안노 히데아키의 애니메이션 <에반게리온> 이야기를 꺼내는 것은 1995년 작인 <에반게리온>이 세기말의 분위기와 고뇌를 품은 작품이기도 하거니와, 현재까지도 끊임없이 재생산되는 해석의 두께가 두툼한 일본 서브컬쳐 문화의 여전히 유효한 역작이라고 여기고 있기 때문이다. 아마 관심 없는 이들에게는 그저 일본 소년 로봇 만화 정도로 치부될지도 모를 이 작품에 대해서 짧은 글로 전부 이야기할 수는 없겠다. 세세하게 다루기에 대중성이 있다고는 도무지 말하기 어려운 파편적인 이미지와 서사가 있고, 무엇보다 인물과 상징과 결말을 난해하게 나열하고 설명도 불충분할뿐더러 TV판, 구 극장판, 신 극장판, 소설판 등 내용 진행과 결말이 다른 여러 갈래의 버전이 있는 탓에 그 어떤 해석도 사견일 뿐 정론이 될 수 없는 작품이기 때문이다. (이 작품을 프레임 단위로 멈춰가며 장면 분석하는 사람들도 있고 학술 논문도 있을 정도니, 텍스트로 벌충하는 설명의 난감함이 대략이나마 전해지길 바란다.) 다만, <에반게리온>을 짧게나마 안내한다면 나는 수천 년에 걸친 서구의 기독교적 문화 요소와 철학을 일본 특유의 다신 다종교를 섬기는 태도로 수용하며, 거기에 동양의 사상과 세기말을 지나는 일본 청년들의 실존에 관한 고민을 인류의 종말이라는 관념으로 은유하고 실험하여 카를 융의 신비주의 심리분석학 기법으로 사유하는 작품이라고 요약하여 안내하고 싶다. 최대한 노력해도, 이 정도이다. 

 

나온 지 30년이 된 작품이므로 작품의 핵심 설정을 열어 말해도 큰 무리는 아니겠다. <에반게리온>은 우선 주인공을 비롯해 모든 등장인물의 선악이 쉽사리 구분되지 않는다. ‘사도’라고 불리는 정체 모를 거대한 괴수들이 인류를 멸망시키러 주기적으로 지구에 강습한다는 <고질라>나 <울트라맨> 같은 일본 고전 특수촬영물 같은 설정 와중에도 주인공은 연약하여 쉽게 피폐해지거나 잘못된 행동으로 상황을 망친다. 강건한 육체나 정신이 없는 소심하고 창백한 히키코모리 소년이다. 인류를 지키기 위해 탑승하는 로봇도 디자인부터 괴물인지 아닌지 분간이 가질 않는다. (실제로 설정상 뼈와 근육과 혈액이 있는 인조인간에 가깝다.) 인류의 편이므로 곧 정의의 편이라 해도 좋을 지구 방위대 같은 조직 ‘네르프’도 사실 알고 보니 이 모든 음모의 흑막이다. 이러한 세계관에서 핵심 설정은 바로 네르프의 ‘인류 보완 계획’이다. 그들이 주창한 ‘인류 보완 계획’은 개별적으로 존재하는 개인의 영혼을 전부 헐고 하나로 뭉쳐 단 하나의 의식과 자아를 공유하는 초자아적 존재로 인류가 거듭나야 한다는 개념이다. 각각 무수하게 퍼진 작은 물방울을 전부 큰 대야로 쓸어 담아 가득 고인 한 덩어리로서의 물이 되는 것. 그 한데 모인 액체처럼 되어야만, 신이라는 조물주가 강제로 창조하고 부여한 피조물로서의 운명을 초월하여 신과 대등해지는 ‘인간’으로 진화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인간은 더 이상 다투거나 분열하지 않는다. 인종도 성별도 무의미하다. 인간은 서로 오해 없이 이해하고, 이해할 필요도 없이 그저 모두가 즉시 동일한 존재가 된다. 인간이 거주하는 지구라는 자연을 개체가 불어나느라 훼손할 일도 없으며, 만약 우주에서 인간 외의 다른 존재와 대면하게 될 때, 인간은 단 하나의 의사와 태도로 일관할 수 있으므로 다른 어떤 군집을 이룬 존재보다 강력한 존재로 우주 패권을 장악할 수 있다. 또한 그 이전에 신이 있다면, 인간은 비로소 신에게 하나의 목소리로 질문하거나 대답할 수 있게 된다. 신을 사랑한다거나, 혹은 증오한다거나. 타협이나 조율할 필요 없는 단 하나의 목소리를 갖게 되는 것이다. 그것을 인간이라는 종이 가질 수 있는 최고의 혜안이자 궁극적인 종의 ‘보완’이라고 전망하고 실행하는 것. 몇 개의 옥좌를 둘지 무수하게 많은 나무 벤치를 둘지, 그런 고민을 하며 싸우거나 죽이지 않고 오직 단 하나의 왕좌만 있으면 되는 폐쇄적이고 표백된 평화 세계로의 지향. 그게 어떤 버전의 <에반게리온>이든 작품 중심에 박혀 있는 핵심 플롯이다. 

 

나는 흔히 말하는 ‘메인컬쳐’와 ‘서브컬쳐’의 구분이 ‘집단’을 사유하는 태도로 구분된다고 여긴다. 투입되는 자본력과 매체의 전통성 여부는 차치하고, 서브컬쳐로 분류하는 창작물이 가지는 일본 애니메이션적인 화법이나 소수 오타쿠 문화의 총칭처럼 사용되는 요즘의 용례 이전, 그 구분과 표현 기저에 인간과 사회를 어떻게 바라보는지에 관한 시선이 ‘메인’과 ‘서브’의 구분을 가른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인간을 긍정할 것인가. 아니면 부정할 것인가. 이도 저도 아닐 것인가. 우리가 서브컬쳐라고 부르는 것들 대부분은 인간을 향해 회의적인 눈빛을 던지는 작품이 많다. 인간이 이뤄낸 문명과 가치를 무조건 긍정할 수 없다는 것이다. 경제 버블의 몰락으로 큰 사회적 붕괴를 겪었던 일본에서 서브컬쳐라 불리는 문화가 탄생하게 된 것도 이러한 맥락에서 가늠할 수 있다. 모두가 만들고 낙관한 시스템을 의심하는 것. 비판하는 것. 그리고 질문하는 것. 나는 그것이 주류가 될 수 없는 비주류의 슬픈 본질이라 여긴다. 자의든 타의든, 의심하고 질문하는 자는 곧잘 배척당하거나 구석으로 밀려나기 마련이다.

 

신경림 시인께는 죄송하지만, 지금의 우리, 이곳은 이제 더 이상 “못난 놈들은 서로 얼굴만 봐도 흥”겨울 수는 없는 곳인 것만 같다. 우선 우리는 이제 얼굴만 봐도 서로 불쾌한 일들이 더 많다. 자신의 못남을 자인하고 극복하기에는 세상과 절연하지 않는 이상, 숨어 기댈 구석이 마땅치 않다. 아날로그를 지나온 세상에서 사람은 타자에게 빠르고 광범위하게 낱낱이 진열되기 십상이다. 못나면 함께할 수 없다. 함께 하다가는 나도 못나지므로. 나의 못남은 너의 앞에서 감추고 너의 못남은 더욱 드러내서 나의 못남을 희석한다. 사람이 더욱 간악해져서? 갈수록 세계가 그 방법이 훨씬 생존에 유리한 쪽으로 구축되고 있기 때문은 아닐까. <에반게리온>이 던지는 존재론은 언제나 늘 극단적이고 악의적인 측면이 있다고 생각해 왔다. 진지하게 고려할 만한 부분이 아니라고 여긴 셈이다. 그러다 문득 ‘네르프’의 결론을 일정 부분 이해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인간의 적은 언제나 인간이었으므로. 인간에게서 인간을 구해야 할 방법이 언젠가는 필요해질 것이므로. 물론, 그것을 실행하는 건 다른 문제이지만.

 

내가 신뢰하는 <에반게리온>의 결말은 구 극장판의 결말이다. 인류 보완 계획이 끝내 모두의 동의 없이 강제로 성공하고만 이후, 모든 인간이 자신의 육체와 정신의 형태를 잃고 핏빛 바다로 환원된 세상에서 주인공 소년에게만 선택권이 주어진다. 소년만큼은 자신의 선택으로 삶의 모든 고통을 벗고 커다란 초자아로 편입되어 초월적 존재가 되거나 그렇게 되지 않을 수 있다. 피폐하고 나약하고 소심한 주인공은 가까스로 자신과 자신을 거의 증오하다시피 했던 애증 관계의 소녀만을 신세계의 아담과 이브처럼 복원한다. 끝까지 커다란 결정을 책임질 용기가 없어 회피했다고 볼 수도 있다. 그로써 인류 보완 계획은 성공도 실패도 아닌 방향으로 종결된다. 낙관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창세기로 인류를 롤백했을 뿐, 결국 수천 년 후에 다시 인류는 똑같은 운명과 상황에 직면할 것이므로. 그러나 그 순간 소년은 대의가 아닌, 개인을 선택했을 뿐이다. 자신의 절망과 슬픔과 분노, 타인의 증오와 갈등을 그럼에도 오롯한 자신의 영혼을 그러쥐고 감당하는 쪽으로. 결말 부분의 소년은 결코 숭고하거나 영웅처럼 묘사되지 않는다. 그저 작중에서 보였던 그 히키코모리 그대로다. 그저 인간이다. 나약하고 초라한 인간인 소년의 뒤로 기괴하게 변해버린 붉은 바다가 넘실거린다. 함께 복원된 소녀는 소년을 바라보며 최악이라고 경멸 어린 한마디를 내뱉는다. 거기서 작품은 암전한다. 그러면 곧 보게 된다. 모니터든 스마트폰이든 검게 꺼진 화면에 난감하고 오묘한 표정으로 <에반게리온>의 세계와 소년을 바라보던 내 얼굴이 비쳐 보인다는 걸. 물론 나 역시도 입술만 잘근잘근 씹는다. 도무지, 인간이라는 질문에 어떤 대답을 해야 할지 모르겠으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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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현우

2014년 조선일보 신춘문예로 당선하며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시집 『사람은 왜 만질 수 없는 날씨를 살게 되나요』 『우리 없이 빛난 아침』과 산문집 『나의 아름다움과 너의 아름다움이 다를지언정』이 있다.